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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의 대화 3

오늘의 생각

by 케나다코리안 2020. 8. 2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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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할머니를 생각해 봅니다

 

대한민국 장성에서 태어나셨는데

사실 살아 생전에 여쭤보지 않아서

정확한 주소는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를 낳아주신 할머니는

술과 노름을 좋아했던 할아버지 때문에

친정이 있는 장성으로 돌아오셔야 했습니다

 

 

잘 사는 이모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이모들은 한없이 냉대했다고 합니다

잘 사는 이모집에서 할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했다고 하는데요

더 비참한 것은

할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할 때

첫째 큰아버지와 둘쨰 큰아버지도 머슴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제가 먹고 살기 위해 머슴 일을 하는데

제 아들도 그 집에서 아버지를 따라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한없이 까대기쳤을 것입니다

돼지우리를 치워라, 볏짚을 쌓아라,

농사일은 기본이었을 것이고

장작을 떼러 쉼없이 산을 올라다녀야 했을 것이며

아들이라도 저작거리에서 만나는 길에는

면 없는 얼굴을 하고 슬며시 눈을 감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꼭 그랬었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무튼

그렇게 제 아버지는 그런 환경에서

셋째로 태어났다는데

제 기억으로 625 전쟁 통에 고창에서

장성으로 넘어가셨다고 합니다.

머슴의 기억은 이 이후의 일이어서

시차가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아무튼 아무튼 잘 사는 이모 집에

동생의 남편과 조카들을 머슴으로 부리는

황망한 일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조그맣고 여윈 할머니 또한

아들만 여섯을 낳으셨는데

생각해 보니 살아 생전에 한 번도

환히 웃는 모습을 저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늘 꾹 다문 입에

세상 걱정 다 이고 사는 그 모습은

어린 제가 보기에도 너무 아팠습니다

 

 

돌이켜 할머니에게도 어여쁜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남편 만나 행복하게 사는 꿈도 꾸었을 것입니다

사랑했기에 결혼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맺어준 인연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믿으며

순종하며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무살이나 되었을까요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약주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첫째 아들을 임신하고

둘째 아들을 임신하고

셋째 아들을 임신하고

넷째 아들을 임신했습니다

품었던 다섯 째도 아들이었고

품었던 막내도 아들이었습니다

 

여섯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1940년대부터 50년대 후반까지

할머니는 진이 다 빠지셨을 것입니다

쪼그라들어 젖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고

죽었는갑다 죽었는갑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날 휑하니 돌아오셨습니다

서방이 왔지만 서방이 낯설었을 것입니다

 

징용으로 끌려갔으니

몸이 온전했을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

생존이 기쁨도 누릴 틈 없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념이라는 허상에 빠져

죽고 죽이고 창을 찔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가 끝나고 광복이 찾아와

해방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다시 전쟁이 터졌고

사람들은 대포에 총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는 전쟁통의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지금의 제 삶은 삶도 아닐 것입니다

 

 

조선자치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많은 사람들은

산으로 쫓겨났고, 반공에 사로잡힌 이승만 정부는

그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며 죽였습니다

살기 위해 그 빨갱이들은 밤이면 내려왔고

김일성인지 뭔지 전설 같은 그 사람의 지령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글자 한 자도 못 읽는 무식쟁이들이 완장차더니 사람들을 저렇게 죽여댔다며

한숨 쉬던 할머니를 생각하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잘 못 걸리면 죽을 수 있으니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인명을 부지해갔을 것입니다

낮에는 미군정에 시달리고

밤에는 빨갱이에 시달리고

먹고 살 길은 없고

언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 판국에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튼 가장 처참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도무지 살릴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음실음 앓던 아이들은 죽어나갔고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는

밤하늘을 찢어놓았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이 생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시기시기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던

기억들이 쓰리고 아팠다고 합니다

 

 

언젠가 장성을 향해 오줌도 누기 싫다는 아버지의 취기어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없이 아팠던 땅

되돌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해도해도 너무했다는,

어린 날 북받힌 설움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몇 번이고 저를 보시며

누구시오 누구시오 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드신 듯

우리 손주 왔냐 하시던

할머니

 

할머니를 조금 더 다정하게

안아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함에

사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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